이제 웬만한 가정이나 식당에서는 정수기 물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물의 정체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정수기가 물을 걸러내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지만, 국내에서는 역삼투압 방식이 주류를 이룬다. 세균과 바이러스 등 유해 성분은 물론, 물에 녹아 있는 미네랄 성분까지 걸러내는 방식이다. 따라서 정수기 물은 말 그대로 무색무취의 H2O이다.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다. 인체에 꼭 필요한 미네랄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정수기 물을 계속 마시는 것이 인체에 해로울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대체 왜 이런 논란이 일어나는 것일까.
정수기 물과 일반 수돗물에 각각 물고기 10마리씩을 넣었다. 하루가 지난 후 정수기 물에 넣은 물고기 중에서 8마리가 죽었다. 수돗물 속의 물고기는 모두 살았다. 국립수산과학원의 실험 결과이다. 임한규 국립수산과학원 양식관리과 박사는 “정수기 물에 미네랄이 없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으로 본다. 증류수처럼 미네랄이 없는 물은 생명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오래전부터 알려진 이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기 쉽게 실험한 것이다. 사람이 정수기 물을 마셨다고 해서 당장 치명적인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영향을 받을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가정·직장·식당 등에서 정수기 물을 마셔왔다. 지금도 그 물로 밥을 짓고 커피를 탄다. 지난 1991년 대구 낙동강 페놀 사태 등으로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 커질수록 정수기 물에 대한 믿음은 굳어졌다. 그만큼 정수기 물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위의 사례처럼 최근 들어 정수기 물에 대한 전문가들의 지적이 늘어나고 있다. 세균 오염 등 단순한 정수기의 문제가 아니라 마시는 물 자체에 대한 것이어서 심각성을 더한다.
정수기가 물을 걸러내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지만, 국내에서는 역삼투압 방식이 대부분이다. 정수기 10대 중 8대가 이 방식의 제품이다. 수돗물을 거름막(필터)에 통과시키면 세균과 바이러스 등 유해 성분이 걸러진다. 문제는 물에 녹아 있는 미네랄 성분까지 여과된다는 점이다. 칼슘·칼륨·마그네슘·나트륨 등 미네랄은 인체 구성의 3%를 차지하며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성분이다. 결과적으로 정수기 물은 말 그대로 무색무취의 물(H2O)이다.
국제물학회 “정수기 물 마시지 말아야”
모든 성분을 여과한 정수기 물은 깨끗한 물이라는 등식을 국민은 여과 없이 믿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 깨끗한 물이 건강에 이롭지 않다는 실험 결과가 하나 둘 나오고 있다. 울산MBC가 울산 지역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가 눈길을 끈다. 도심에 사는 6학년 초등학생 31명 중 21명이 정수기 물을 마시고, 시골에 있는 6학년 초등학생 20명 중 18명은 수돗물을 마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문 기관에 의뢰해 이들의 머리카락 성분을 분석했더니, 칼슘이 정상 범위에 있는 도심 초등학생은 10명 중 4명이지만, 시골 초등학생은 9명으로 집계되었다. 마그네슘이 정상 범위에 있는 도심 초등학생은 3명, 시골 초등학생은 5명이었다. 아이들의 식습관이 모두 다르므로 이와 같은 결과가 물의 미네랄 부족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상명대 화학과에서 더 직접적인 실험이 진행되었다. 일반 물과 정수기 물에 사람의 세포를 넣어 무균배양실에서 배양했다. 일주일 후 현미경으로 세포(미토콘드리아)를 관찰하고 건강 상태도 측정했다. 일반 물에서 배양한 세포가 정수기 물에서 배양한 것보다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쉽게 설명하면 1에 가까울수록 건강한 상태인데, 일반 물에서 배양한 세포는 0.918, 정수기 물에서 배양한 세포는 0.726이라는 값이 나왔다.
사람은 물만 먹고 사는 생명체가 아니므로 미네랄이 없는 물을 마셨다고 해서 몸의 세포가 금세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네랄이 세포 건강과 밀접한 관계인 것은 사실이고, 세포의 건강 상태는 암과 같은 질병과 연관이 있다. 몸의 수많은 세포 중에 건강하지 않은 세포는 변형을 일으켜 암세포가 된다. 암은 유전성이 있지만, 세포를 건강하게 유지하면 암 발병을 낮출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포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에 미네랄은 필수이다. 이동호 분당서울대병원 건강증진센터장은 “미네랄이 부족하면 세포의 신호 전달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각종 암이나 성인병에 이를 수 있다는 보고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미네랄이 없는 정수기 물은 장기적으로 건강에 도움이 안 된다. 정수기 물을 마시면 삼투압 작용으로 그나마 세포에 있던 미네랄이 세포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미네랄과 건강은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고농도의 미네랄 물이 혈액에 미치는 영향을 살핀 실험을 진행한 김광용 연세대 원주의대 기능수연구단 박사는 “술을 많이 마시면 적혈구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피가 엉긴다. 적혈구가 서로 달라붙은 현상(용전)인데, 이처럼 피가 걸쭉해지면 혈관을 막아 여러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 미네랄이 풍부한 물을 마시면 이런 현상을 줄일 수 있다. 일반인 두 명에게는 정수기 물을, 다른 두 명에게는 미네랄 물을 마시게 했다. 물을 마시기 전후의 혈액을 채취해 관찰했더니, 미네랄 물을 마신 사람의 적혈구 엉김이 풀어졌다. 그러나 정수기 물을 마신 사람의 적혈구에서는 변화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정수기 물은 산성수여서 먹는 기준에 부적합”
미네랄과 질병과의 관계를 알아보는 실험도 있다. 부산의료원 노인병원이 미네랄과 고혈압·당뇨병과의 관계를 실험했다. 병원에 입원해서 병원 식사를 하는 고혈압 환자 45명에게 미네랄 물을 30일 동안 마시게 했더니 27명의 혈압이 호전되었고, 혈압이 약간 증가하거나 변화가 없는 사람은 각각 9명이었다. 당뇨 환자에게도 같은 실험을 했다. 28명 중 20명이 호전되었고, 8명은 당뇨 수치가 약간 증가하거나 변화가 없었다. 이에 대해 정수기 업계는 반발한다. 병원에서 제공하는 식사 외에 다른 식품을 섭취할 수 있고, 혈압이나 당뇨가 얼마나 호전되었는지 수치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세대 원주의대에서도 비슷한 실험을 했다. 당뇨병에 걸린 쥐를 두 그룹으로 나눈 후, 한 그룹에 정수기 물을 주고, 다른 그룹에는 미네랄이 풍부한 심층수를 공급했다. 물 외에 먹이는 모두 같게 제공했다. 한 달 후, 심층수를 마신 쥐의 혈당은 떨어졌다(293→265mg/dl). 정수기 물을 마신 쥐의 혈당은 올랐다(271→275mg/dl). 미네랄이 당뇨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며, 미네랄이 없는 물은 당뇨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수기업계는 반박한다. 미네랄은 물뿐만 아니라 음식으로도 섭취하므로 모든 실험 결과가 물, 특히 정수기 물 때문이라는 점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정수기업체 관계자는 “여러 물질 중에서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걸러낼 수 없는 것이 현재 기술의 한계이다. 세균은 걸러내면서도 미네랄을 통과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일부 악의를 가진 사람들이 이 점을 지적하며 정수기 물이 좋지 않은 것처럼 주장한다. 예컨대 정수기 물에 미네랄이 없으므로 마시면 건강에 해롭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미네랄은 일반 식품으로 얼마든지 섭취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정수기 물에 대한 다양한 실험 결과가 있는데, 그 실험의 기간이나 환경이 미흡해서 그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음식으로 미네랄을 섭취할 수 있다. 그런데 식품의 미네랄이 예전 같지 않다는 보고가 있다. 이미 1970년대 미국 의회 보고서에는 채소나 과일의 미네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식물이 토양으로부터 미네랄을 얻는데, 토양의 미네랄이 20~30년 전보다 30분의 1로 줄어들었다는 내용이다. 물 박사로 통하는 김현원 연세대 원주의대 생화학교실 교수는 “식품에도 미네랄이 있지만 그렇게 풍부하지 않다. 토마토의 예를 들면, 칼슘 농도가 과거보다 10분의 1로 줄었다. 또 채소와 과일이 영양분을 흡수하는 토양의 미네랄이 적어졌고, 토양도 오염이 많이 되어 있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볼 때, 물에 있는 미네랄이 식품보다 10배 이상 가치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외국은 어떤가. 최근 정수기 물 분석을 위해 독일과 일본 등지를 다녀온 전문가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수질 관련 박사 학위자인 박치현 울산MBC 부장은 “증류수에 가까운 물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는 점은 상식이다. 상식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가치도 없다. 선진국은 미네랄이 없는 물의 부작용을 알고 오래전부터 역삼투압 정수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그냥 수돗물을 마신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미네랄과 건강에 대한 문제 제기나 연구조차 없다. 이런 정수기는 아프리카와 같이 물이 극심하게 오염된 지역에서 정수하기 위해 사용할 뿐이다. 유독 한국은 정수기 물의 환상에 젖어 있다. 나는 독일 본 대학에 정수기를 들고 가서 물 분석을 의뢰했다. 정수기 물은 먹는 물로 부적합하다는 결과를 얻었다”라고 말했다.
임신부는 특히 정수기 물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는 권고도 나왔다. 잉글리드 로스버그 국제물학회 미네랄연구팀 박사는 “임신부에게 역삼투압 정수기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할 것이다. 미네랄이 부족한 물은 자녀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미네랄이 없는 물은 증류수와 같다. 이런 물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은 몇 세대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라고 강조했다.
정수기 물의 또 다른 문제는 산성을 띠는 물(산성수)이라는 점이다. 산성과 알칼리성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pH)가 6.8~7.6 정도의 수돗물이, 필터를 통해 나오면서 pH 5.5 안팎의 산성수로 변한다. pH 수치가 7보다 낮으면 산성이고, 높으면 알칼리성이다.
인체는 산성과 알칼리성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능력(항상성)을 갖추고 있다. 산성이나 알칼리성 음식을 먹으면 몸이 알아서 중화해서 pH 7.4 정도로 유지한다. 이 때문에 pH 7 정도의 물이 사람 몸에 적합하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먹는 물 기준을 pH 6.5~8.5로 정했고, 한국도 그 기준을 pH 5.8~8.5로 정해두었다.
빗물은 pH 5.7 정도의 산성이다. 빗물은 땅속으로 스며들어 여러 광물 성분을 머금은 후에는 pH 7.4~7.6의 물이 된다. 산성의 물을 중화하는 역할을 미네랄이 하는 것이다. 잉글리드 로스버그 국제물학회 미네랄 연구팀 박사는 “우리 몸에는 산성과 알칼리성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다. 이 기능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물질이 중탄산염이라는 미네랄이다. 이 미네랄이 공급되지 않으면 암 발병률이 높다는 연구가 있다. 암 환자의 대다수가 산성화 체질이다”라며 미네랄의 역할을 강조했다.
정수기업체들도 이 사실을 알고 개선하기 시작했다. 박영재 호서대 산학협력학부 교수는 “정수기 물은 산성수여서 사실상 먹는 물 기준에 맞지 않는다. 최근 업체들도 이 사실을 알고 pH 수치를 올려 먹는 물 기준에 맞추는 제품을 내놓고 있다. 필터의 구멍을 넓혀 미네랄이 약간은 통과하게 만든 것이다.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정수기업계도 미네랄이 없는 물이 건강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냉정하게 정수기 물에 대해 면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과거 더운 여름날 한창 뛰어놀던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 한 구석에 있는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수돗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당시 수돗물 정화 시설이 지금보다 열악했을 터인데도 별 탈이 없었다. 20년 전부터 정수기 물이 수돗물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요즘 정수기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없다. 가정에 정수기가 없더라도 직장이나 식당에서 정수기 물을 마실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 물을 전문가들이 의심한다. 정수기업계는 전문가들의 실험 결과를 신뢰하지 않는다. 정수기 물을 두고 불신만 쌓이고 있는 셈이다. 역학조사 등을 통해 정수기 물에 대한 실체가 객관적으로 밝혀지기를 국민은 바란다. 정부가 나설 차례이다.
국제 사회가 마련한 좋은 물의 기준이란 유해 물질이 없고, 산소량이 많으며, 미네랄이 적절히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에 맞는 물은 깨끗한 샘물이다. 특히 오색약수·고란약수 등의 샘물은 미네랄이 풍부해서 물맛부터 다르다. 그러나 도심에서 샘물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