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우리나라 외과학의 기반을 다지다.
전 재산을 기부, 우리나라 최초 민립공익법인 “재단법인 백병원” 설립
외과의사 백인제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외과의사들을 많이 배출하여 우리나라 외과학의 기반을 다진 백인제 박사는 1899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나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경의전)에 진학하여 의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경의전 재학시절 가장 나이가 어린 학생이면서도 리더의 역할을 하였으며, 학업에도 열정적이어서 수석의 자리를 한 번도 놓치지 않을 정도의 인재였다.
백인제와 독립운동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 재학시절(1919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고, 일제에 체포되어 8개월여 동안 고초를 겪었다. 그는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3·1운동에 단독으로 참여했음을 강조하는 한편, 조선의 독립을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당시 구속된 그를 구명하기 위해 모교 경성의학전문학교는 일제의 사법 당국에 백인제에 대해 “명석한 노력가로 항상 우수한 성적을 얻어 현재 본교 특대생이며 아무런 결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며 탄원서를 제출했고, 최종판결에서 백인제는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에 처해졌다.
백인제는 3·1운동으로 퇴학을 당하고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지만, 경의전 시절의 부단한 노력과 그의 재능을 알아본 당시 스승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의사로 대성하는 기초를 닦았다. 백인제는 1920년 다시 경의전에 복학하여 수석으로 졸업을 했다.
의학박사 백인제
백인제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의사로서의 월등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3·1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의사면허증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아끼던 스승들의 추천에 의해, 의사 면허를 받기 위해 당시 총독부의원에 2년동안 근무하며 마취과 일을 맡았으며 그 결과, 뛰어난 마취 기술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익힌 탁월한 마취솜씨가 외과 의사로 대성하게 된 데 기여할 수 있었다. 이에 더욱 학업에 정진하여 1928년 동경대학 의학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곱 번쨰 의학 박사였다. 그는 약관 스물아홉의 나이에 1928년 모교인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외과 주임교수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내내 경의전의 주임교수가 된 사람은 백인제와 유일준 뿐이었다.
국내 최초의 수혈조직 ‘수혈협회’와 백인제 박사
백인제 박사의 섬세한 손놀림은 많은 사람의 찬사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과 관련 과학지식을 체득하여 ‘당대 제일의 외과의사’가 될 수 있었다.(<역사속의서울의대> ‘외과학의 개척자-백인제’에서 발췌) 백인제 박사는 수혈 분야에도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당시 외과 강사였던 장기려 박사에 의하면 백인제 박사는 수혈과 공혈자(供血子) 제도의 필요성을 설명하여 교수회의의 승인을 얻어 ‘수혈협회’를 외과교실 내에 두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수혈조직이라 할 수 있다. 1938년 혈액 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선진국의 의학계에 비해 결코 뒤ᄄᅠᆯ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1954년 백병원이 민간병원 최초로 혈액원을 개설한 것의 바탕이 되었다.
의료 혜택을 넓히고 의료 인력을 양성하는 시스템
백인제 박사는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의학연구차 유럽과 미국을 시찰하던 중, 병원 경영에만 급급해하지 않고 의료혜택을 넓히고 의료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미국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 있는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을 방문하고, 미국의 의학이 유럽에 비해 실험과 연구에서 뒤ᄄᅠᆯ어진 반면, 임상기술은 더 발달한 것을 발견했다. 메이요 클리닉은 시골마을에 위치해 있던 사립 병원으로 1889년에 개원한 뒤 지금까지 전세계에 명문 병원으로 유명하다. 시골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 환자에게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대규모의 시설 구비, 임상과 연구를 병행할 수 있는 연구환경 조성, 환자의 재정적 여건을 고려한 의료수가 책정등 식민지 의료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매혹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백인제 박사는 두차례 걸쳐 구미의학계를 시찰하였고, 이러한 경험은 메이요 클리닉과 같은 훌륭한 의료기관을 설립하겠다는 포부를 갖는 계기가 되었다.
재단법인 백병원 설립
인술제세(仁術濟世)의 이념 아래 인술(仁術)로써 겨레와 인류를 구한다는 것, 의학 연구와 교육, 특히 교육을 통해서 나라와 겨레를 구할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백인제 박사는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높은 뜻으로 그동안 병원 운영을 통해 마련한 전 재산을 기부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 공익법인인 재단법인 백병원을 설립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공익법인인 재단법인 백병원은 여러 변수들이 잠복해 있던 당시의 복잡한 사회환경에서는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역동의 시대를 살다 간 외과의사 백인제 박사의 삶을 통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인술제세의 이념 아래 인술로써 겨레와 인류를 구한다는 것, 의학 연구와 교육, 특히 교육을 통해서 나라와 겨레를 구할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