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칼럼

‘부자의 품격’ 노블레스 오블리주 -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제목 :
‘부자의 품격’ 노블레스 오블리주 -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등록일시 :
2021-07-21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084

 

9대가 정승 판서 참판을 지낸 명문가 - 6형제 50여 가족이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

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하다 - 전 재산 600억 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집도 몸도 조국에..

배부른 노예보다 배고픈 투사의 가문 - 신흥무관학교, 만주에 세운 독립운동기지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선생은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으로 명문 세가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약관 20세부터 신지식을 받아들여,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독립운동가이자 위대한 사상가이다.

 

 

9대가 정승 판서 참판을 지낸 명문가 자손

 

이회영(李會榮, 1867.3.17.~1932.11.17) 선생은 서구와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던 1867년 서울 남산골에서 이유승(李裕承)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역대 선조들이 계속 높은 벼슬을 한 조선조의 명문가였다. 아버지는 이조(吏曹)판서를 지냈을 뿐 아니라 그의 10대 조는 다섯 번의 병조판서, 세 번의 좌우 정승과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이다. 이항복 이래 이유승에 이르기까지 9대 모두가 정승, 판서, 참판을 지낸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이 가문에서 우당 이회영을 비롯해 형 이건영(健榮) 이석영(石榮) 이철영()과 아우인 이시영(始榮) 이호영(頀榮) 등 일곱 형제 중에 6명의 형제 50여 가족이 1910년 국치(國恥)를 당하자 모두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배부른 노예보다... 6형제 60여 가족이 만주로 망명

 

나라가 일제의 손에 넘어가자 이회영 선생은 일제의 갖은 회유에도 불구하고 전 재산(6백억 원~2천억 원)을 팔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집도 몸도 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즉시 5형제들을 불러 모았다.

 

슬픈 일이외다. 한일병합의 괴변을 당하여 나라가 왜적에 속했습니다. 우리 형제가 명문 자손으로 대의를 위해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구차하게 생명을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지 않겠습니까?

 

191012, 이씨 일가와 노비들까지 60명이 넘는 일행은 영하 20도 강추위를 온몸으로 견디며 대동강, 신의주,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압록강을 건널 때 뱃사공에게 뱃삯을 넉넉히 주며, 나중에 일본군에게 쫓기는 독립군이 압록강을 헤엄쳐 건널 때 배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뒷날 뱃사공은 약속을 지켰고 독립군들 사이에 압록강 뱃사공 일화가 널리 퍼졌다.

 

청산리 전투 주역 배출한 불꽃같은 삶 - 신흥무관학교 설립

 

이회영 선생이 명문(名門)을 팽개치고 형제, 가족들과 함께 온몸을 바쳐 독립운동을 전개한 시기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3.1운동까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시기와 중국에서 일본 영사관과 일본군 수송선 폭파 등 격렬한 항일운동을 전개한 시기이다.

 

선생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계몽 운동(1898)을 주도하며, 을사오적에 대한 규탄(1905), 안창호 전덕기 양기탁 이동녕 신채호 노백린 등과 함께 설립한 비밀결사 신민회 활동(1906)을 주도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한 '헤이그 특사 파견'이 뜻을 이루지 못하다 해외 독립운동 기지 설립을 결심한다.

 

중국 동삼성(일제는 만주라고 불렀음)에 이상설 이동녕 등을 특파해 교포 자녀교육을 하게 한 서전서숙 개설(1907)을 이끌었으며, 우여곡절 끝에 중국 땅에 자리 잡은 6형제는 새로운 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19114'농사를 지으며 민족 교육을 실시하는 곳' 이란 뜻의 농업 생산과 교육을 위한 교민 자치단체 경학사를 조직했고, 6월에는 독립군 군사교육을 위해 신흥무관 학교를 설립했다.

 

이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3,500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했다.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등 대다수 졸업생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의열단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이처럼 신흥무관학교는 일제 식민 지배에 정면으로 맞선, 용맹한 독립운동가의 요람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청산리 전투의 주역들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의 활약은 독립운동사에 큰 전기를 마련하는 기틀을 제공하였다.

 

또한 재() 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1924), 항일구국연맹 조직(1931) 등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중국인들과 함께 구축한 항일구국 연맹으로 상하이 북역 사건, 아모이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 톈진항 일본 군수 물자 수송선 폭파 사건, 톈진 일본 영사관 폭사 사건 등 선생의 의거는 계속 실행되었으며, 이 같은 꺼지지 않는 독립 투쟁의 기운 속에 이듬해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가 실현된 것이다. 이는 독립운동사에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 이회영 선생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마지막 임무

 

이회영이 예순다섯이 되던 1932, 마침내 그는 민족을 짓누르는 절망감을 떨치기 위해 최후의 임무를 자신에게 맡겼다. 만주로 들어가 독립운동 조직을 살리고,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하고 일본군을 몰아낸다는 대담무쌍한 계획이었다. 다른 동지들이 만류하자 이회영은 말했다.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네. 그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이 또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홀로 배를 타고 만주 대련에 상륙한 이회영은 결국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나흘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리고 만주의 뤼순감옥, 안중근 의사가 교수형을 당한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오직 백성만 생각했던 백발의 투사는 머나먼 이국에서 최후를 맞았다.

 

이회영 선생과 그 가족은 누구보다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지만, 기어이 전 재산을 다 내놓고 조국의 독립을 위한 시대의 부름에 목숨을 다하여 응답했다. 우리는 이회영 선생의 일가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와 가족이 버텨 준 10년이 없었다면,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국격을 넘은 무수한 젊은이들은 싸울 길을 찾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가 온몸으로 버텨 낸 30년이 없었다면, 많은 독립운동가가 적에게 투항했을지도 모른다. 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한다는 이회영 선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삶은 현재도 여전히 정신으로 살아있어 우리의 가슴을 찌르고 삶을 되돌아보며 고개를 숙이게 한다.

 

(아름다운 동행 대표_김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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