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칼럼

'부자의 품격' 노블레스 오블리주 -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제목 :
'부자의 품격' 노블레스 오블리주 -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등록일시 :
2021-07-16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857

 

철강 왕 카네기 '부자인 채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

미국 기부문화의 시초

도서관 2,500여개, 종합대학 12개, 교회 5,000곳을 지어 사회에 기부

자선사업과 교육, 문화 분야에 거액 기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미국 최초의 근대 자본가

 

미국을 지탱하고 자본주의를 지속케 하는 근원은 기업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정신이다.문명이 발전하려면 물질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사회 지도층이 모범을 보이고 사회적 기여를 통한 실천이 요구된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산업화 과정에는 수많은 천재 발명가들과 발명품들의 지대한 공헌이 있었다. 이들 발명품들이 상품화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많은 재정 지원과 효과적 사업 수완이 요구되었다. ​'강철왕' 카네기는 제철 분야에서 효과적 경영관리를 발명품과 접목시켜 거대한 부를 일구어낸 미국 최초의 근대 자본가이다.

 

 이민자 출신 소년 직공, 철도회사를 거쳐 '강철왕'이 되다.

 

카네기는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1848년 12살 때 미국으로 건너왔다. 일찍부터 사업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방적공, 기관 조수, 전보 배달원, 전신 기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철도 감독으로 자리를 잡았다. 천재적인 투자 솜씨를 발휘하여 재산을 모을 수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1872년 톰슨 제철공장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철강사업에 뛰어들었다. 16세 때인 1851년의 앤드류 카네기는 주급 2달러 50센트를 받는 전보 배달원이었지만, 43세 때인 1878년의 앤드류 카네기는 미국 최대의 강철 공장을 설립한 백만장자이며 '강철왕'에 등극해 있었다.

(출처 : Wikipedia)

자기보다 더 우수한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았던 사람 - 미국 자본주의 발흥기의 전형적인 산업자본가

카네기는 자신의 돈은 한 푼 들이지 않고 부자들을 끌어들여 사업을 확장하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회사 경영만은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그는 밖에서 모은 돈으로 재정이 악화된 경쟁사들을 사들이고, 원료와 상품 수송을 위해 독자적인 철도망을 구축하기도 했다. 1889년 연간 32만 톤에 불과하던 톰슨 제철공장의 생산 능력이 10년 후인 1900년에는 300만 톤을 넘어설 만큼 그의 사업은 눈부신 성장가도를 달렸다. 이와 더불어 사업 이윤도 1888년 200만 달러에 불과했으나 1901년에는 무려 4천만 달러가 되었다. 1890년에 이미 카네기는 미국 제철사업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끊임없는 재투자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해 나갔다.

기업 경영에 과학적 기업 관리법을 도입

카네기의 사업 성공의 비밀은 무엇보다도 기업 경영에 과학적 기업 관리법을 도입한 데 있었다. 즉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생산성을 얻기 위해 생산라인과 인적 관리 방식을 획기적으로 개혁했던 것이다. 테일러는 생산 과정에서 낭비되는 요소들을 측정하여 노동자가 최단 시간에 최대한의 생산을 낼 수 있는 시간과 노동관계를 연구했다. 그가 최초로 도입한 과학적 기업 경영법은 후일 프레드릭 테일러의 이론화 과정을 거쳐 이른바 '테일러 주의'라는 이름으로 미국 기업들에 정착되었다. 테일러의 제안에 따라 기업들은 노동의 전문화와 임금의 능력차등 지급제를 도입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생산능률화 혁명인 테일러 주의는 계속 확대되었다. 헨리 포드는 테일러 주의를 도입하여 성공한 대표적인 기업인에 속한다.

 

부의 공익화 실천, 함께 성장하는 백만장자

 

앤드류 카네기는 미국 자본주의 발흥기의 전형적인 산업자본가이며 대 철강 트러스트를 형성하고 생애 후반에는 교육과 문화 사업에 전념했다. 카네기는 철저한 자본가 정신과 과학적 기업 경영으로 미국 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 이바지를 했다. 때로는 이윤을 위해 철저한 자본가이면서 동시에 부를 공익에 돌릴 줄도 아는 인간적 자본가이기도 했다. 카네기는 사업을 확장하면서 채용한 고급 제철 기술자들에게 사업이 성공을 거둘 때마다 주식을 나누어주곤 했다. 이렇게 해서 그가 만들어낸 백만장자만 40명이 넘었다.

 

​도서관 2,500여 개, 종합대학 12개, 교회 5,000여 곳 사회 기부

카네기는 한창 사업 확장에 분주했던 1868년, 나이 33세 때에 이미 은퇴 계획을 세운 바 있었다. 35세에 은퇴하고 생활비 연 5만 달러를 제외한 나머지 수입은 모두 자선사업에 쓰겠다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그의 은퇴는 계획보다 30년이 늦은 1901년에야 이루어졌지만, 지연된 햇수에 걸맞게 자선사업에 쓸 돈은 크게 늘어나 있었다. 당시의 4억 8천만 달러는 현재 가치로 대략 100억 달러가 넘는다. 이후 카네기는 여러 분야의 자선사업을 관장할 기구를 조직해서, 1902년에 카네기 협회, 1905년에 카네기 교육 진흥재단, 1901년에 카네기 국제 평화 재단, 1911년에 카네기 재단이 설립된다. 1901년 카네기는 자신의 제철 회사를 J.P. 모건에게 약 5억 달러에 팔아넘겼다. 당대의 거물 은행가로 카네기의 회사를 거액에 매입해 사상 최대의 철강회사인 '유에스스틸'을 설립했다.

(출처 : Wikipedia)

자신의 수중에는 약 2억 5천만 달러가 남았는데 이 돈으로 그는 여생을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에 헌신했다.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멜론 대학이 그의 재정적 후원에 의해 설립된 대학이다. 일생 동안 그가 자선 명목으로 기부한 돈만도 수억 달러에 달했다.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

카네기의 묘비명에는 "자기보다 훌륭하고 덕이 높고, 자기보다 잘난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모을 줄 아는 사람 여기 잠들다"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긴 부자,  "자선왕"인 그의 나눔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도전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역사적으로도 로마제국부터 르네상스까지 이탈리아를 지탱한 힘이었다. ​지성은 그리스인 보다, 체력은 게르만 민족 보다, 기술은 에트루리아인 보다, 경제력은 카르타고인 보다 뒤떨어졌지만 로마는 지도층의 솔선수범으로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운 것이다. 높은 공공의식과 교양을 갖춘 시민이 있었기에 '2000년 로마'가 융성했던 이유이다.

 

(아름다운동행 대표_김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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